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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VIRGINIA주 QUANTICO "MARINE MUSEUM 헌화"를 마치고.....

 VIRGINIA주 QUANTICO "MARINE MUSEUM 헌화"를 마치고.....

미해병박물관 "장진호 전투 기념탑"에 KG55 동문 명의로 헌화 증정을 마쳤습니다.

임덕천동문, 이진세동문 그리고 이건형동문 세분 명의로 진행했습니다.

앞으로 중국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룰것에 대한 깊은 생각은 반듯이 필요합니다.

중공군 개입이 없었으면 아마도 지금 지옥 보다 더 처절한 북한 동포 존재는 없었을것 입니다.

사진 몇장과 장진호 전투 관련 자료를 첨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장진호 전투, CHOSIN FEW“

1950625일 북한의 기습적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그 당시는 체험한 세대는 이제 서서히 뒤안 길로 접어드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참혹하고 치열한 전투는 중공군 참전으로 지속되었고 전사에 남는 장진호 전투주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해가 가능하게 아래 3개 문건을 첨부해본다.

1950915일 인천상육작전 성공, 928일 서울 수복으로 국군과 UN군은 북진을 지속하게 된다.

이승만대통령과 미국 정부 사이에 이견속에서 평양을 탈환하면서 통일 목전에 두게된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새로운 군면으로 전환되면서 동쪽 두만강까지 진군한 미해병은 혹한 속에서

불가피한 철수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그 기간은 19501126일부터 1213일 까지 역사에 남는 전투가 진행되었다.

그 전투를 기념하는 탑은 VIRGINIAQUANTICO소재 미해병박물관에 세워졌다.

현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박근혜대통령) 양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 탑을 유심히 보면 탑윗 부분에 빛나는 별(START)이 보이고 그 명칭을 KODORI-STAR라고 칭하게 된다.

철수 작전중 기온은 영하 38도로 모든 것이 얼어버린 처참한 상태였으나 KODORI(지)에 비추는

별은 병사들을 위로해준 것 같다.

그 작전 결과로 흥남철수작전에 피난민 10만명을 데리고 나오는 작전도 성공하게 된다.

장비를 가득 채운 틈새에 피난민이 자리를 차지했고 문재인대통령 부모님도 승선 남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위싱톤DC 소재 한국전참전용사 기념공원(KWVM PARK)헌화에

추가하여 US MARINE BASE MUSEUM에도 2018년부터 헌화를 시작하였다.

지난 123일 현지 헌화를 마친 사진을 첨부한다.

미해병 피해: 전사 1,029, 부상 4,582, MISSING(행불); 4,894

70년전 이맘때 치열한 장진호 전투는 지속되고 있었다.

그 희생에 우리들 마음의 감사를 전한다.

20201204

서울에서.....장문영

 

(1)장진호 전투의 한국인 참전자

70년 전 바로 이 순간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에서 처절하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501127일 시작돼 1211일까지 이어진 장진호 전투다.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사단이 주력을 이룬 유엔군이 인해전술의 중공군과 영하 3040도의

혹한이란 이중의 적과 맞서 싸운 극한 전투였다.

유엔군은 압록강으로의 북진을 눈앞에 두고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물러섰으니 아군은 패배한 것일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장진호는 무슨 의미를 남겼을까.

미군과 중공군이 치른 전투의 참전자 중에는 소수의 한국인도 포함돼 있었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두 사람의 용사와 흥남철수의 선상에서 태어난 사람을 찾아 인터뷰했다.

19509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서울 수복에 성공한 유엔군은 북진을 서둘렀다.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에서 전쟁을 총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고향에

돌아가서 하게 해 주겠다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동부 전선을 맡은 미군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이 10월 함남 원산에 상륙한데 이어

보병 7사단이 함남 이원에 상륙해 북진을 서둘렀다.

그 속에 장동욱(93)씨를 비롯한 한국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군 참전으로 긴급히 편성된 카투사 1기생 800여명이었다.
부산 피난을 갔다가 징집에 응했는데 간단한 신체검사 후 K11로 시작하는 군번을 받고 바로 배를 탔다.

다음날 내려보니 일본 요코하마였다.

미군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처음 투입된 실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에서 수원·오산·병점을 거쳐 북쪽으로 퇴각하던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뒤 부산 수영비행장에

집결해 있다가 다시 수송선을 타고 함남 이원으로 상륙했다.

함흥을 점령한 뒤 곧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써 전쟁이 끝나고 통일도 되는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갑작스레 장진호 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중공군에 포위돼 고립되어 있던 해병 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해병 1사단이 포위된 것은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휘말린 결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 지휘부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해 와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진호에 동원된 중공군 9병단은 12만명, 여기에 맞서는 미군은 해병대와 보병을

합쳐 3만명으로 중과부적이었다.

장씨가 속한 31연대는 황초령과 고토리를 통해 장진호로 들어가 열흘간 악전고투를 치렀다.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게 두려웠다.

중공군은 낮에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만 되면 나팔소리, 피리 소리와 함께 기습을 해왔다.

말그대로 벌떼처럼 새까맣게 달려들어 백병전이 펼쳐졌다.

낮에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이 그렇게 폭격을 해도 중공군은 밤만 되면 나타났다.”

적은 중공군뿐만 아니었다. 문제는 추위였다. “나도 함경도 출신이라 어지간한 추위는 견디는 편인데

장진호는 전혀 딴판이었다.

더운 지방 출신의 미군은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중공군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 눈밭에서도 천으로 된 신발을 신었으니까. 낮에 중공군 20여명이 동사체로 눈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트럭에 싣고온 동사자들을 한꺼번에 웅덩이에 묻는 것을 봤다. 입에서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소총 용수철이 얼어 사격이 제대로 안될 정도였고 손이 총신에 그대로 달라붙어 조준이 힘들었다.

수류탄 안전핀도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장염에 시달렸다고 미군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 식량을 얼음 상태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대장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열흘 남짓 버티는 동안 많은 전우를 잃었다고 회고했다.

철수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는 전투를 치러가며 장진호에서 120떨어진 흥남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묵호로 빠져나왔다.

국군 수도사단 포병에 전속된 그는 휴전 직전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금성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아군이 전멸하고 혼자 중공군 적진에 남게 돼 열흘동안 빗물을 받아마시며 버티다 탈출에 성공하는 등

생사의 기로를 숱하게 넘나들었다.

인천상륙에서부터 장진호 전투를 거쳐 금성전투까지 거치며 불사조처럼 살아 남은 그의 개인

이력은 6·25 전사(戰史) 그 자체였다.
미군 통역장교로 해병 1사단에서 복무하다 장진호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른 한국인도 있다.

존 리란 이름으로 미 해병대 전사에도 등장하는 이종연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부터 미국에 체류중인 그와는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그의 부대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서 다른 부대와 고립된 가운데 사투를 펼쳤다.

하갈우리의 전투병은 2개 중대 600명이 전부였는데 중공군은 1128일부터 이틀간 1개 사단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하지만 우리를 이기지 못했다. 밤새 전투를 치르고 날이 밝은 뒤 보면 수백명씩 중공군 시체를 보았다.”
그는 한국인 카투사 50명을 지휘해 무사히 철수시킨 공적이 있다.

장진호를 넘어와 우리 해병대와 합류한 보병사단 병력중에 카투사 100명 정도가 있었다.

나머지 카투사는 다 전사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 50명을 나에게 예속시켜줬는데 철수 도중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병력 손실 없이 흥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전체의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유엔군은 인해전술과 혹한이란 철옹성에 막혀 북진을 중단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전쟁 사가들은 이를 위대한 후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 변호사의 생각은 달랐다.

미군이 유인 전술에 휘말려 포위당하고 철수를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공군에 5만명 사상자를 내는 궤멸적 피해를 입혔다.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말처럼 우리는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한 것이다.

다만 공격의 방향을 바꾼 것 뿐이다.”
이 변호사의 평가는 이랬다.

미군이 북진을 중단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항미원조를 내걸고 참전한 중국이 뜻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쟁의 일면을 본 것일 뿐이다.

미군이 장진호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9병단은 그 뒤 6개월간 남하해 오지 못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고 회복하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대구까지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그랬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지금 남아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장진호에서 숨져간 용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선 장진호에서 살아돌아온 소수 생존 용사들을 초신 퓨(Chosin Few)라 부른다.

이 변호사도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1980년 정식 사단법인이 결성돼 미 정부에 등록이 되어 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어 발음이다. 당시 미군이 일본어 지도를 기반으로 작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것이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미 해병대의 정예 이지스함 중에도 초신함으로 명명된 함정이 있다.

장진호 전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장진호 전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흥남철수다.

미군이 철수할 때 10만여명의 북한 피난민이 자유를 찾아 함께 남하했다.

탱크와 대포를 내려놓고 피난민 14000명을 태워 1225일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도착한

빅토리아호의 이야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속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타고 있었다.

이 배 위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경필 장승포 가축병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진호 전투와 내 나이가 똑같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영웅들은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생면부지의 땅에서 동사(凍死)를 무릅쓰고 싸운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게 장진호 전투입니다.”
장진호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정부 주관의 추모 행사와 별개로 민간에서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를 꾸렸다.

장진호 전투가 막을 내린 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13일에서는 거제도에서도 조촐한 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예영준 논설위원(중앙일보)

 

(2)19501207, 미해병대 고토리 집결

 

아침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중공군 시체 더미가 하갈우리 A중대의 진지에서부터

철도 옆의 보급품 야적장을 거쳐 이스트힐의 산기슭까지 널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1천 구 이상은 되었다. 이에 비해 방어의 주력이었던 5연대 1대대에만 한정하자면

전사자 10, 부상자 43명이었다.
7연대가 도로를 따라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따라 이제 5연대도 하갈우리를 버리고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3대대가 다시 한 번 선봉에 섰다.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길가에는 중공군 시체들이 쌓여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부대들이 하갈우리를 빠져나가자, 유담리에 이어 이번에도 5연대 2대대가 후위에

후위를 담당하기 위해 홀로 남았다.

그 중에서도 E중대가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이들은 후퇴하면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해체하거나 불태웠다. 이때의 불길을 18 km를 지나 고토리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들이 따라 많은 피난민들도 따라가고 있었고, 중공군은 감히 미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피난민들을

공격했는데 겁에 질린 피난민들이 미군 속으로 뛰어들자 미군들은 총검으로 위협하여 대열에서

나가 100 m쯤 뒤를 따라오게 하였다.
그날 밤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였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하갈우리에서 오는 데 거의 40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일대에 퍼져있던 해병대 3개 연대가 집결하였다.

다만 1연대 1대대만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있는데, 그들은 진흥리에서 나와 황초령의 파괴된

교량을 감제하는 1081고지를 점령할 임무를 받았다.
하갈우리에는 무려 병력 14천 명이 몰려있어 만약 중공군에게 포병이 있다면 한순간에 피바다가

펼쳐질 상황이었다.

물론 중공군에게 대포는 없었다.

그동안 새롭게 발생한 부상자를 후송하려고 마을 북쪽에 있는 길이가 짧은 정찰기용 활주로를 이용하였다. 여기에 이착륙할 수 있는 구식 해군 뇌격기를 통해 2백 명을 후송하였지만,

다음날 폭설이 내려 남은 부상자 4백 명은 지상에 대기하였다.
5·7연대는 탈진 상태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단 하루 휴식도 없이 다음날 미명을 기해 출발하기로 하였다.
가장 중요한 강철제 M-2 답교 부품 4개조 Set는 예정대로 공수투하 되었다.

8개 중에서 4개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는데, 운 좋게도 해병대가 확보한

남은 4개가 풀세트를 이루었다.

이는 그대로 찰스 워드 중위가 지휘하는 육군 58 답교중대에게 인계되면서,


처음으로 해병대가 육군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날 태평양지구 미 해병사령관 르무엘 쉐퍼드 중장이 비행기편으로 현장 방문을 왔는데,

가는 길에 그동안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마거릿 히긴스기자도 함께 데려간다.


이날 밤 937분 무렵, 구름이 걷히고 고토리 남서쪽 산 위에 굉장히 밝은 별이 홀로 빛났다.


당시 고토리에 있던 여러 미군들에게 그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지 여러 기록이나 증언에서 언급하고,

장진호 전투의 상징으로 삼아 '고토리의 별(Star of Koto-ri)'이라고 부른다.

2017년에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소재 미 해병대 박물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제막했는데,

석비 상단에도 고토리의 별을 표현한 상징물을 올려놓을 정도.

그렇다면 도대체 고토리의 별이 뭘까 궁금해질 텐데,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Texas State University)

천체물리학 교수 도널드 올슨(Donald W. Olson)2018년 저서에서 바로 목성이었다고 밝혔다.

 


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릴 때,

그보다 북쪽에 있던 미7보병사단과 한국군 1보병사단은 큰 방해를 받지 않고 철수했다.

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는 미3보병사단이 후위를 맞아 엄호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이미 사실상 괴멸한 상태라 쫓아오지 못해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다.

심지어 다음 달에 벌어지는 중공군 3차대공세에 동부전선 중공군 12개 사단 전체가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서부전선 중공군의 18개 사단만 참가한 3차 대공세에, UN군은 서울까지 빼앗기며 작살났었는데 

만약 동부전선 중공군마저 3차 대공세에 참가했다면 UN군은 훨씬 위태로웠을 것이다.
해병대는 1215일 흥남 부두를 떠났고 한국군은 물론 피난민 10만 명과 동승하였다.
1224일 마지막 남은 병력 미해군UDT가 흥남 부두를 대폭발로 날려버려 황무지가 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중국 국경을 향해 북으로 진격하던 국제연합군과,

국경을 넘어 남으로 진격해온 중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결과 연합군이 38선 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단순히 중국군이 승리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누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생각하면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3배에 가까운

피해를 안겨준 연합군이 승리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영문 위키에는 전투의 결과를 중국군의 전략적 승리,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라고 기재했다.

북으로 진격하던 연합군은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남으로 진격하던 중국군은 목표를 이루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중국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누구의 피해가 더 큰지 따지면 중국군의 피해가 더 크므로,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이 승리한 것이다.

 

 

(3) Remembering.....

“Chosin Few” 70 years after one of the bloodiest battles of the Korean War

Updated Nov 11, 2020;Posted Nov 11, 2020

By Editorial Board, cleveland.com and The Plain Dealer

Seventy years ago this week, hundreds of Cleveland and Akron reservists who’d been activated to plug holes in front-line units in the Korean War disembarked their ships in Korea and were rushed to the front in rugged terrain near the Chinese border. What they encountered in the hills near the Chosin Reservoir was unexpected and bloody: China’s surprise Thanksgiving attack across the Yalu River, intervening in the war and overwhelming widely dispersed U.S. Army infantry units in hills to the east of the reservoir, known as Changjin in Korea, and elements of a Marine division to its west. Army troops and their wounded were brutally cut down as they tried to retreat south through narrow mountain valleys. Those who escaped across the ice to Marine positions joined Marines in their epic but costly “breakout” from Chosin, fighting through Chinese forces and enduring the savage cold, frostbite and deep snow of one of the coldest

Partly because of this influx of Ohio reservists, a disproportionate number of Ohioans wereamong the thousands who fell, went missing or were woundedin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 and its aftermath.

Today, 415 Ohioans are still missing in the Korean War-- 6% of all U.S. MIAs in the conflict.

The late Arthur Laslo of Parma, a Marine Corps veteran of the Chosin battle, who tracked Clevelanders who fought there for the “Chosin Few” group, said in a 2000 Plain Dealer article that, of 85 Marines from Cleveland who fought at the Chosin reservoir, 41 were killed or remained missing.

Ohioans also were prominent among veterans of that battle who returned home with their pain, guilt, and injuries intact to a nation not inclined to extend the same heroes' welcome to veterans of the 1950-1953 “Forgotten War” as had been afforded World War II troops just a handful of years earlier. It took until the late 1990s for the 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to recognize their frostbite and other cold-related injuries as service-related.

 

In 2000, on the 50th anniversary of the start of the Korean War, The Plain Dealer talked to five Marine veterans of the Chosin breakout. Besides Laslo, they were Edward Szymciak of Strongsville, Richard Oddo of Parma, Dan Montville of Parma Heights, and Arthur Dickard of Bedford. Today, most of them and most other veterans of the battle have ended their earthly life but remain proud in the memory of other Marine veterans and Army infantrymen. As they should.

Szymciak described the Marines' brutal, sustained effort to break out of Chinese entrapment in cold so intense that food parcels dropped by U.S. planes froze before they hit the ground.Tootsie Rolls were the exception, small enough to stuff in pockets -- and into one’s mouth -- to thaw, and enjoy. He also admitted to an enduring fondness for Spam.

When that article was written 20 years ago, more than 8,000 Americans were still MIA in Korea. That number has been reduced by nearly 20%, thanks to the Pentagon’s efforts to identify unknown remains buried in Hawaii and to recover remains from the Chosin battle and elsewhere in North Korea during a brief thaw in relations in the early 2000s. Among remains recovered in 2002 and 2003were those of U.S. Army Pvt. 1st Class Francis Crater Jr. of Barberton, who was killed Nov. 28, 1950, trying to rescue fellow soldiers during the surprise Chinese attack in 30-below weather east of the Chosin. Crater’s heroics were described in a 2001 Plain Dealer article by a soldier Crater rescued. In the chaotic retreat, the bodies of fallen soldiers had to be left behind, including Crater’s. He was just 21 years old at his death. His remains were identified by Pentagon MIA experts in 2006 and he was buried with military honors at Greenlawn Memorial Park in Akron.

 

Today, Veterans Day, we honor all our veterans, many of them, like the veterans of the Chosin battle, scarred in mind, heart and body from their experiences of war. We celebrate their sacrifice, their heroism, their dedication to country and community. But we also remember those no longer with us, whose memories, stories and bravery live on. Let us never forget, and forever honor those who fought with such dedication and perseverance for this nation’s freedoms.

About our editorials:Editorials express the view of the editorial boardof cleveland.com and The Plain Dealer -- the senior leadership and editorial-writing st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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