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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김원웅 광복회장 / 이경훈 기자

광복회장 김원웅의 정치 행적 따라가 보니…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18년간 몸담았던 집권당을 뛰쳐나간 김원웅 회장.
1992년에는 ‘꼬마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돼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2000년에는 다시 한나라당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김원웅이라는 ‘캐릭터’와 당시 ‘정치적 사건’을 연결 지으면, 그가 걸어온 길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대학만 12년 다녀… 1962년 연세대 法大 입학, 65년 자퇴, 서울대 국문과 卒 정치학과로 학사편입
⊙ 전두환 대통령, 김원웅의 黨 보고서 유출에 激怒
⊙ “JP 욕을 그렇게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65년 지기 소꿉친구)
⊙ “공화당 공채 출신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에 처음 본다”(공화당 시절 선배)
⊙ “머리가 상당히 좋다. 발언이 과격하지만, 철저히 계산된 것”(민정당 시절 후배)
⊙ 저서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부모님 중매”
⊙ 반론 질의서에, “전혀 근거 없는 風說. 《月刊朝鮮》 《朝鮮日報》와 인터뷰하지 않는 게 20년 가까이 지킨 입장”
지난 8월 24일 김원웅 광복회장이 국회에서 “일부 언론이 나의 공화당 경력을 왜곡 보도를 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비판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뉴시스
  김원웅(金元雄·76) 21대 광복회장. 포털사이트 옛날 신문 코너에 ‘김원웅’이란 이름 석 자를 검색하니 그가 ‘민정당 창당 준비위원’에 이름을 올렸던 기사(1980년 12월8일자 《경향신문》)가 눈에 들어왔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백선엽 장군의 간도특설대 활동은 부역(附逆)이지만, 자신의 민주공화당(공화당)·민주정의당(민정당) 이력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90년 그는 돌연 집권당을 뛰쳐나가 1992년 노무현·이기택 등이 모인 ‘꼬마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처음 당선됐다. 무엇이 집권당 탈당을 감행하게 만들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1980년 공화당 해산부터 1981년 민정당 창당, 1990년 3당 합당, 1992년 14대 총선까지 그가 보인 행적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의 동료·선후배의 증언으로 김원웅이라는 ‘캐릭터’를 파악하면 ‘민정당 전국구 58번 김원웅’이 왜 민주자유당을 뛰쳐나갔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원웅 회장의 프로필을 여러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정보가 제각각이었다. 1944년 3월 중국 충칭(重慶) 출생이라는 점과 대전고(41회)를 1962년에 졸업했다는 내용만은 같았다. 김 회장의 대전고 동기 중 유명인사 10명의 프로필을 확인하니, 대전고 41회는 1943~1945년생이 함께 학교에 다녔다.
 
  다만, 그의 대학 입학·졸업 연도는 불분명했다. 특히 대학 졸업 연도는 1972년 졸업과 1974년 졸업으로 나뉘었다. 그의 저서에서도 대학 입학·졸업 시기는 빠진 채 대전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고만 적혀 있다.
 
정치인들과 함께 쓴 저서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왼쪽부터 박계동 전 의원, 김원웅 광복회장,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을 통해 김 회장이 살아온 궤적을 파악해보려 했으나, 그는 자서전이 없는 정치인이었다. 그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책은 노무현·유인태·박계동·김홍신 등과 공저한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1997) 정도다. 여기에도 ‘대전고·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만이 적혀 있다.
 
  김 회장의 65년 지기 소꿉친구인 P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김원웅은 원래 연세대를 다니다가 데모를 해 제적당했어요. 1~2년 뒤에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과로 전과(轉科)를 했어요.”
 
  연세대 법대에 입학한 김 회장이 1965년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연세대생 김원웅(21·법과 3년)군은 서대문서 정보계 형사 3명에게 검거되려는 순간 높이 3미터의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팔과 허리 등에 전치 1주일간의 상처를 입었다.〉(1965년 8월29일자 《동아일보》)
 
  이에 대한 김원웅 회장 본인의 진술도 있다. 그는 201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펼친 ‘한일협정반대운동(6·3사태) 구술사료수집사업(이하 구술사료)’에 구술자로 참여해 ‘등록금을 면제받으려고 연세대 지원.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던 중 집시법·반공법 위반으로 연행. 자퇴서를 쓰고 이듬해 선고유예로 정리’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후 김 회장은 입시를 다시 치러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과에 입학, 1972년 졸업 후 정치학과에 학사편입해 졸업(1974)했다. 법학과를 자퇴할 때의 학년과 국문과 입학 연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국문과 졸업 후 공화당 공채 7기로 입사
 
공화당 공채 6기 윤원중(15대 의원) 전 국회사무총장.
  김 회장이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공화당 사무처에 입사했다면, 그는 공화당 공채 8기(1974년 입사)여야 한다. 이에 김 회장의 공화당 공채 선배 E 전 의원은 “김원웅이 원래 연대를 다니다가 제적을 당했다. 1972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공화당 7기로 사무처에 들어왔다. 나중에 학사편입으로 정치학과에 간 것이다”고 했다.
 
  기록과 증언으로 볼 때, 김 회장은 1972년이 되어서야 정치인 내지 정치학도가 됐다. 그 이전까지는 연세대 법대 이력과 서울대 국문과 경력뿐이다. 그러나 김 회장의 저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65년 한일협정반대 시위를 묘사한 부분) 한 번도 일제 36년을 배상받은 적이 없는데 포기라니, 그런 문법은 세상에 없었다. 세상에, 나는 분노했다. 장남으로서의 의무감은 내게 빨리 졸업을 해서 취업하라고 부추겼고, 젊은 정치학도로서의 나는 한일회담을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p.27)
 
  ‘젊은 정치학도’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당시 그는 연세대 법대생이었다. 이때부터 자신을 정치학도라고 여겼는지, 대필 작가의 실수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김원웅 회장의 ‘민정당 근무는 생계 때문’이라는 주장에 P 전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김원웅이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대전에서 찐빵 장사를 했어요. 가난하게 자랐죠. 생계 때문에 공화당·민정당에 들어갔다고요? 당대에 꿈이 있으니 들어간 것이죠. 돈 벌려면 장사를 해야지….”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W씨. 그는 김 회장과 동년배(同年輩)이다. 김 회장이 1992년 14대 총선에서 꼬마민주당 후보로 대전 대덕구에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왔다.
 
  “생계 때문에 민정당에 갔다고? 서울대 정치학과 나온 사람이? 그때는 순서가 있었어요. 서울대 정치학과 나오면 우선 되든 안 되든 사법고시를 봐요. 안 되면 행정고시, 그다음이 외무고시. 그다음에 가는 데가 한국은행, 락희(LG그룹의 모체)야. 야심이 있으니 당에 갔지.”
 
  김 회장이 공화당 사무처 공채 7기(1972년)로 들어갈 당시 공화당 사무처의 위상은 어땠을까. 공채 6기(1970년)인 윤원중 전 국회사무총장(15대 의원)은 “공화당 사무처 출신들의 모임인 ‘은행나무동지회’가 김원웅 회장 때문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말부터 꺼냈다.
 
  “공화당은 1964년부터 사무처에 근무할 이들을 완전 공개 경쟁으로 뽑았습니다. 한 번에 10명 정도인데, 100대 1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어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공화당 공채 출신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만 22명입니다.”
 
 
 
공화당 공채, 90對 1의 경쟁률

 
1981년 1월 15일 열린 민주정의당 창당대회. 공화당 사무처에 근무하던 김원웅 회장은 민정당으로 옮겨갔다. 사진=조선DB
  김 회장이 공화당에 지원할 당시의 기사이다.
 
  〈13일 마감한 공화당의 제7회 사무국 요원 모집에 무려 893명의 응시자가 쇄도. 이번 시험에서 약 10명을 뽑게 되므로 90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인 셈. 공화당 관계자는 64년 사무국 요원 시험이 실시된 이래 가장 높은 경쟁률과 가장 많은 응시자가 몰려들었다고.〉(1972년 1월14일자 《경향신문》)
 
  공화당 사무처 공채의 인기(人氣)는 뜨거웠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이후에도 이 인기는 식지 않았다. 공화당 공채 마지막 기수인 11기 모집 당시의 기사이다.
 
  〈18일로 원서를 마감한 공화당 제11기 사무국 요원 공채에 1150명(여자 289명 포함)이 응모해 공화당 사무처는 흐뭇한 표정.〉(1979년 12월19일자 《동아일보》)
 
  한 기수에 10명을 뽑는데, 1150명이 몰렸으니 경쟁률은 115대 1이다. 당시 공화당 사무처 공채 출신들은 ‘급료가 넉넉지는 않았다’고들 말한다.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이들과 ‘정치 꿈나무’들이 대다수였다.
 
  윤 전 총장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우리는 공화당 공채 출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프라우드(proud·자랑스럽게)하게 생각하는데…. 그걸 ‘(김 회장은) 밥벌이하러 들어갔다’고 하니 은행나무동지회에서는 ‘우리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뭔가 조치를 하려고 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3공(共) 주체 세력으로 큰 보람 있는 일을 했고, 평생을 조국 근대화를 위한 일역(一役)을 담당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처음 봅니다.”
 
  공화당 사무처 직원 김원웅은 1977~ 79년경에 대만으로 유학을 갔다. 어떤 목적으로 갔고, 무슨 학위 논문을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저서에도 ‘중국 국립정치대학원에 유학을 했다’는 문구만 적혀 있다. 당시는 한국과 대만 간에 정식 국교(國交)가 있던 시절이었다.
 
  대전고 출신의 전 의원 G씨는 “김원웅이 대만에 다녀온 후 장징궈(蔣經國) 총통과 양자(養子) 관계를 맺었다고 동료들한테 자랑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2012년 7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19대 국회 개원식에서 연설을 마친 뒤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강창희 국회의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P 전 의원과 윤원중 전 의원에게 ‘김 회장의 대만 유학’에 대해 물었다.
 
  “공화당 사무처 요원 할 때 당에서 돈을 대줘 대만에 유학을 다녀왔어요. 논문은 못 썼을 겁니다. 공화당이 망하기 직전 JP(김종필)가 (당) 총재가 된 뒤 한국으로 돌아왔어요.”(P 전 의원)
 
  “공화당에서 학자금을 일부 지원받는 혜택으로 대만에 1년 연수를 다녀왔어요. 상당한 특혜 내지 배려를 누린 다음에 (공화당을) 짓밟은 것에 굉장히 불쾌합니다. 제가 지금 황소회 회장인데, 모임을 열면 황소회에서 제명할 예정입니다.”(윤원중 전 의원)
 
  황소회는 민주공화당 중앙당(공채) 및 지구당 사무처 출신의 전국 모임이다. 공화당의 상징 동물인 황소에서 그 모임명을 따왔다.
 
  1979년 12·12사태로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군인들은 서울 남산 아래 있는 공화당 당사(黨舍·중구 소공동)를 점령하고, 신생 정당 창당을 위해 선별 작업을 벌였다. 공화당 사무국 직원 김원웅은 1980년 12월 8일 민정당 창당 준비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민정당이 공화당 사무처 직원들에 대한 고용 승계를 보장했는지 궁금했다.
 
  공화당에서 민정당으로 옮겨간 E 전 의원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 공화당에서 민정당으로 간 것은 신군부에 충성맹세를 한 것 아닙니까.
 
  “아, 물론이죠. 본인이 원치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고, (민정당이) 의무적으로 데려간 것도 아닙니다.”
 
  대전고 출신 G 전 의원은 “신군부가 민정당을 창당할 때 공화당 직원을 선별적으로 받았다. 그 사람이 살아남(으려)고, 민정당에 들어오기 위해 온갖 로비를 다 한 걸로 난 알고 있다”고 했다.
 
  ‘민정당 시절의 김원웅 회장을 알고 싶다’고 주변에 수소문하니 하나같이 “강창희 전 국회의장(6선·대전고 44회)에게 연락해보라”고 했다.
 
 
  “에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민정당 공채 5기 정양석 전 미래통합당 의원. 현재 국민의힘 서울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사진=뉴시스
  강 전 의장에게 ‘김원웅 회장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니 “그 사람에 대해서는 말도 하기 싫다”는 말부터 꺼냈다.
 
  “민정당에서 같이 있었고, 국회의원도 같이해보고, 외국 여행도 같이 다녔는데…. (이제 와) 그런 사람을 특별히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 김 회장이 생계 때문에 민정당에서 일했다고 하는데요.
 
  “에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사람에 대해선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만 (통화) 합시다.”
 
  강창희 전 의장의 반응에 대해 상당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강창희 전 의장의 성격상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은 ‘베풀 거 다 베풀었는데 나중에 칼로 베더라’ ‘은혜를 원수로 갚냐’ 이겁니다.”
 
  “사람 좋은 강 의장이 학을 뗄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니에요? 오죽 화가 났으면 그랬겠어.”
 
  하나회 출신인 강 전 의장은 1980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곧바로 민정당 창당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1981년 민정당 출범 후 당 요직인 조직국장에 오르고, 1981년 4월 열린 11대 총선에선 35세에 전국구 의원이 된다.
 
  김원웅 회장의 ‘생계 때문이었다’는 발언에 대해 그의 민정당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민정당 사무처 공채 5기(1984)로 당료(黨僚) 생활을 시작해 서울 강북에서 두 차례 당선된 정양석 전 미래통합당 의원.
 
  “그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서울대 정치학과 나와서 정치에 뜻이 있어서 그랬겠지요. 공화당·민정당에서 (급여를) 넉넉하게 준 것도 아니었는데…. 자기 비하나 다름없죠.”
 
  1981년 1월 15일 민정당이 창당한 뒤 김 회장은 당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과거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의 40년 전 당내 이력이다. ▲중앙정치연수원 훈련 부국장(1981년 5월) ▲청년국 부국장 대우(1981년 10월) ▲정책조정국 부국장(1984년 3월) ▲조직국 부국장(1985년 3월) ▲국책연구소 행정 부실장(1985년 4월) ▲청년국장(1986년 10월) ▲정책연구실 상근 연구위원(1988년 5월) ▲민정당 대전 동을 지구당위원장(1988년 7월).
 
 
  민정당 훈련 부국장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사진=조선DB
  그의 민정당 첫 보직은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원을 교육하는 훈련 부국장이었다. 민정당 사무처 출신 재선 의원 S는 이렇게 말했다.
 
  “김 회장이 민정당에 들어와서 중앙정치연수원(연수원) 훈련 부국장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군부에 적극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연수원장이 이영일 의원, 부원장이 정○○ 의원, 훈련 부국장이 김원웅이었습니다.”
 
  과거 신문은 연수원에서 진행한 ‘100만 당원 정예화 교육’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당 사상 최대라는 외형상의 규모와 아울러 과거의 정당 교육과는 달리 조국 통일에 대비하여 북괴 노동당을 제압하자는 데 그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민정당은 당의 이 같은 과제를 체득시키고 당의 역사적 사명을 고취시킴으로써 당원들이 정치 안정의 지주가 될 수 있도록 하고 구시대의 비리와 폐습의 청산, 의식 혁명을 통한 새시대 개혁 의지의 지속화를 통해 개혁 세력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국민화합과 민족정신이 고취되어 어떠한 북괴의 술수나 농간도 제압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내는 데 주력할 것 같다. … 새시대의 정치교육은 국민정치교육의 차원으로 높여 모호했던 ‘주적 개념’을 북괴당으로 분명히 설정하여 … 세심한 배려를 통한 이론 무장과 집체 단련을 통한 정신 무장으로 당원들을 의식화하고 의지화하여 확고한 이념무장을 시키고 … 이념무장을 위한 교과목은 ‘새시대와 구시대’(김원웅 교수)…〉(1981년 6월1일자 《경향신문》)
 
  당원 정예화 교육에서 김원웅 훈련 부국장은 ‘새시대와 구시대’라는 교과목을 맡았다. ‘구시대’란 그가 생계를 위해 입당했던 공화당의 시대를, ‘새시대’란 충성을 맹세한 5공(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공은 이전 정부를 경원시했다.
 
  정훈(政訓)교육으로 장병(將兵)들에게 국가관과 대적관(對敵觀)을 교육하듯, 김 회장은 신군부의 ‘정치 홍보대사’이자 집권당의 ‘정훈장교’가 돼 당원들에게 5공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입했다.
 
 
 
이낙연 기자가 전한 김원웅 출마설

 
민정당 공채 5기 조찬용 남명선생 선양회장.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11·12·15대). 그는 공화당에서 민정당으로 넘어온 ‘훈련부장 김원웅’을 훈련 부국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전 의원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최근의 행보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머리 좋고, 기획력 있는 충실한 요원이었어요. 공화당에서 민정당으로 넘어갈 때 (공화당 직원을) 많이들 잘랐는데, 김원웅은 똑똑해서 (살아남았어요.) 연세대에서도 공부하고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도 공부했고, (서울대) 정치학과 후배이기도 해 내가 챙겨줬습니다. (당원) 훈련 기획 업무도 맡겼는데 당원 연수 교육을 맡기면 상당히 잘해요. ‘앞으로 굉장한 정치인으로 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발언의 수위가) 너무 많이 나갔어요. 연설 내용을 보니까 자기의 소신보다는 뭔가 좀 누구한테 사주(使嗾)받은 사람처럼 이야기해서…. 나이도 먹은 사람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앞장선 사람을 그렇게 엉뚱하게 모독할 수 있는, 그런 언동을 할 사람이 아닌데…. 무슨 총대를 멨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절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 했어요.”
 
  김원웅 회장은 민정당 정책국 부국장이던 1984년경부터 총선 출마를 준비했다. 12대 총선(1985)을 앞두고 민정당 분위기를 다룬 기사를 찾았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인 이낙연 의원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쓴 기사이다.
 
  〈전국구 의원이나 중앙위원이 공천 경합에 나서는 것까지는 몰라도 사무처 직원이 경합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 대전 동구 공천을 노리고 있는 김원웅 정책국 부국장은 당내 분위기에 일단 순응하고는 있지만 생각까지 바꾼 것은 아니어서 당의 자숙 요구는 얼마간 한계에 부닥치고 있는 인상〉(1984년 7월28일자 《동아일보》)
 
  한 달여 뒤 그의 이름이 또 등장한다.
 
  〈뚜렷이 향방이 드러나지 않은 채 치열한 공천 경합을 벌이고 있는 당내 인사로는 하순봉 진주 의원과 김원웅 정책실 부국장 등〉(1984년 9월15일자 《경향신문》)
 
  그의 12대 총선 출마 시도는 실패한다. 총선 출마에 실패한 김 회장은 총선이 끝나고 조직국 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 뒤인 1985년 4월에는 국책연구소 행정실 부실장으로 이동한다.
 
  민정당 사무처 5기(1984) 조찬용씨. 경남도의회 수석전문위원을 지냈고, 2018년에는 합천군수에 출마했었다. 갓 입사한 조씨는 당시 조직국 간사로 김 회장을 직속 상관(조직국 부국장)으로 모셨다. 조씨는 김 회장에 대해 “아주 이재(理財)에 밝았다”며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했다. 목에 힘주는 건 없었다. 권위적이진 않았지만, 아주 개인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씨는 김 회장의 최근 언행에 대해 “발언이 과격하지만, (철저하게) 정치공학적으로 계산된 것”이라며 “돈이 된다는 걸 아니까 저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3당 합당 이후 김 회장의 탈당도 어느 정도 ‘비빌 언덕’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라며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탈당을 감행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건 유출 사건
 
  민정당 시절 김원웅 회장은 당 내부 문건을 언론에 유출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 총재인 자신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E 전 의원의 증언이다.
 
  “당시 당에서 전두환 총재한테 재가는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체적으로 성안(成案)한 문건이 있었습니다. 완성을 시킨 후 총재한테 보고하려고 했는데, 그 내용이 미리 ○○일보에 특종 보도됩니다. 그때만 해도 언론이 통제받던 시절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기사를 보곤) 펄펄 뛰었을 것 아닙니까? (민정)당에서 ○○일보에 압력을 넣었고, 출입 기자를 통해 소스가 어디인지 (찾으니 유출자가) 김원웅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그래요. 그때 출입 기자가 이○○였습니다. 그 기자도 이후에 체육부로 쫓겨갔어요.”
 
  해당 문건이 언론에 폭로된 시기에 이○○ 기자가 정치부에서 체육부로 소속을 옮긴 것을 확인했다. 이○○ 기자에게 관련 내용을 물었으나 그는 “모른다”고 했다.
 
  국군보안사 출신으로 민정당 조사국장을 지낸 N 전 의원도 김 회장이 민정당 시절 내부 문건을 외부에 유출했다고 증언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성안도 안 된 중요 문건을 외부에 유출한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조사국장일 때인데, 출입 기자 면담 기록을 확인하고, 유출자가 김원웅인 것 같아 지목했더니 김원웅이 ‘제가 했습니다’라고 했어요. 이상재 사무차장(1981~85년 9월 재임)이 있을 때입니다. 국장 회의에서 징계 처리했는데….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없어요.”
 
  이상재 민정당 사무차장은 보안사 출신 정치인으로, 언론 통폐합에 앞장섰던 당의 실세였다.
 
  김원웅 광복회장 역시 ‘구술자료’에서 ‘보고서 언론 유출로 당기위 회부, 감봉 처분’이라고 밝혔다.
 
 
 
민정당 사무처 시절

 
박준병 전 민정당 사무총장.
  김원웅 회장은 1986년에야 국장이 된다. P 전 의원의 증언이다.
 
  “민정당 국장들이 김원웅을 밑에 두는 걸 꺼렸죠. 오늘날로 치면 사회성이 부족했어요. 김원웅이 7기인데, 승진은 1~2년 후배보다 늦었어요. 다들 김원웅을 꺼리니 여성국에서 여성 부국장을 했어요. 당시 이상재 사무차장이 챙겨줬지요. 사무처 선배들과 동기들이 다른 자리로 나간 뒤에야 청년국장이 됐는데, 청년국은 주류가 아니었어요.”
 
  E 전 의원의 이야기다.
 
  “이 친구가 차분히 앉아서 일은 안 하고 말이 많았어요. 기존 체제나 선배를 존중하는 태도도 없었고요. 김원웅이 부국장을 할 때 제가 국장이었습니다. 당시 김원웅을 받겠다는 국장이 없어서 제가 받아줘 구제된 적도 있어요. 민정당 때도 좀 모가 나서 기조·조직·홍보국 같은 주요 직책은 맡지 못하고, 여성국 부국장이나 청년국 부국장을 했어요. 대전고 출신 박준병(전 국군보안사령관) 사무총장(1988년 5~12월 재임)이 오기 전까지는 좋은 보직을 못 받다가 이후에 실세가 돼 좌지우지했죠.”
 
  민정당 공채 출신의 수도권 전직 시장 H씨의 증언이다.
 
  “하루는 제 책상 위에 엉덩이를 올리곤 앉아서 비속어를 사용하며 ‘일한다고 뭐 되는 줄 알아? 내가 가르쳐줄게. 아침에 출근하면 대표실·총장실로 인사부터 하고 다니는 거야. 정치를 하라고 정치. 일한다고 되는 줄 알아?’라고 했습니다. 후배를 제대로 가르쳐주진 못할망정…. 그다음부터는 그 양반을 보면 인사도 안 했습니다. 87년 대선 때는 청년국장을 했는데, 아래 직원들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민정당 전국구 후보 58번
 
민정당 전국구 후보자 순번을 공개하는 방송. 오른쪽이 김원웅 당시 당 청년국장. 사진=MBC 홈페이지 캡처
  13대 총선(1988년 4월 26일)을 앞둔 그해 3월부터 김원웅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양천 갑구에서는 김원웅씨가 본격 채비에 나선 가운데〉(3월8일자 《동아일보》)
 
  〈김원웅 당 청년국장 양천 갑 거론〉 (3월10일자 《경향신문》)
 
  〈현재 이 지역에서 공천이 사실상 확정된 사람은 김원웅 양천 갑, 이종찬 종로…〉(3월14일자 《매일경제》)
 
  〈민정 공천자 명단-서울 양천 갑 김원웅 당 청년국장〉(3월15일자 《경향신문》).
 
  그러나 그는 양천 갑에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원웅 청년국장 등 중앙당 사무처 요원들이 공천 막바지에서 재력자들에게 공천을 빼앗기는 사태가 잇따르자 사무처 국장단은 ‘사무처 요원들의 입장’을 밝히겠다며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3월18일자 《동아일보》)
 
  지역구 공천 탈락 후, 전국구 출마 후보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이회창 전 대법원 판사 등… 김원웅 청년국장 등도 일단 전국구 후보심사 대상으로 선정한 것으로 전해졌다.〉(3월22일자 《경향신문》)
 
  〈김원웅 청년국장… 등이 본인의 강력한 희망과 함께 물망에 오르고 있다.〉(4월4일자 《경향신문》)
 
  그는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후보 58번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민정당은 38번까지 당선자를 냈고, 승계도 41번까지만 이뤄졌다.
 
  그해 7월 28일, 김 회장은 민정당 충남 대전 동을 지구당위원장이 돼 자신의 지역구를 처음 갖게 됐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와 대덕군이 합쳐져 대전직할시로 승격됐다. 그의 지역구도 대전 동-대덕으로 바뀌었다.
 
  1여(與) 3야(野)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다. 정국을 야 3당이 이끌었다. 이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극복하기 위해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에 민정당과의 ‘3당 합당’을 제안한다.
 
  3당 합당은 3당의 이해관계에 맞아떨어졌다. 집권당 민정당은 과반 의석이 필요했고,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제1야당의 지위를 넘겨준 통일민주당, 야당 중 가장 의석이 적었던 신민주공화당도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렇게 3당은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민자당의 등장으로 평화민주당만 소수 야당으로 남게 됐다. 3당 합당 당시 YS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민자당을 떠난 이유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 발표 당시 모습. (왼쪽부터) 김영삼 총재,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총재. 사진=조선DB
  3당 합당에 김 회장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다수의 참석자들이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밀실 작업’ 등 절차상 불만을 표시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토론이 예상외로 열띤 분위기로 치달을 조짐을 보이자 박(준병) 총장은 등단하려는 김원웅 위원장을 가로막고 서둘러 토론을 마무리 지었다. 공화당 아성인 충남 지역 원외위원장들은 처음에 “신당 참가 여부부터 우선 논의해야 한다”고 반발했다.〉(1990년 1월24일자 《한겨레》)
 
  〈당료 출신인 김원웅 대전 동을 등은 당직 복귀를 희망하고 있고…〉(1990년 2월19일자 《경향신문》)
 
  김 회장은 그토록 원하던 지역구를 왜 스스로 반납하려고 했을까. 민정당 충남 지역 원외위원장들은 왜 반발했을까. 13대 총선(1988)만 봐도 JP가 이끈 공화당에 여당은 힘을 못 썼다. 대전·충남 18개 선거구 중 공화당이 13석을, 민정당은 2석만을 얻었다. 민정당 내 충청파는 3당 합당이 이뤄지면 JP계에 밀릴 것으로 생각했다.
 
  1990년 4월, 김원웅 회장은 18년간 몸담았던 집권 여당을 떠나 ‘꼬마민주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곧이어 민주당 대전 대덕구 지구당위원장을 맡는다.
 
  대전고 출신 G 전 의원은 김 회장의 탈당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뜻이 안 맞아서 나간 게 아니에요. 뜻은 이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려고 (지구당)위원장까지 맡았는데, 3당이 합쳐지고 지분 정리 과정에서 (밀려난 겁니다). 충청도에서는 공천 가능성이 0%이니 탈당한 거죠. 당시 3당 합당할 때, 다가오는 1992년 총선(14대)에서 5대 3대 2의 비율로 공천 지분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JP가 20%, YS가 30%, (나머지는 민정당)이거든요.
 
  예를 들어 전국에 235개 지구당이 있다고 치면, JP가 20%를 행사하면 47개 지역구를 공천하잖아요. 대전·충남·충북 지역구를 다 합쳐도 47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서울에도 공천했고, TK 일부도 공천했어요.
 
  김원웅이 당시 민정당 대전 동구 지구당위원장을 하고 있었어요. 3당 합당이 이뤄지니 지역별로 위원장이 세 명이 되잖아요. YS·JP·민정계…. 충청은 JP의 영지(領地)잖아요. (3당 합당으로) 민정당·YS계 지구당위원장은 충청도에선 정치 생명이 100% 끝나는 것이니 저쪽으로 간 거죠.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때는 ‘100% 안 되는 것’이었죠. (당시 공천은) 지분이었습니다. 철저한 지분.”
 
  김원웅 후보를 도왔던 민주당 출신 W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자당은 ‘공천을 받느냐’가 중요했고, 우리(민주당)는 ‘공천은 받아도 (당선)되느냐’가 문제였죠. 당시에는 ‘꼬마민주당이 50석 갖고 간다’고 했는데, 우리도 허풍이라는 걸 알았죠.”
 
  김원웅의 선배인 E 전 의원에게 물었다.
 
  — 3당 합당 이후 당을 뛰쳐나가는데….
 
  “그때는 자기가 공천을 받으려고 했는데, (당에서) 공천을 안 주니까 뛰쳐나갔고요.”
 
  — 충청 지역은 JP 텃밭이라 나간 것 아닙니까.
 
  “그랬을 거예요. 당에서 공천을 줬으면 안 나갔죠. 공천이 안 되니까 나갔는데 그게 뭐 나중에 잘된 거죠. (그렇게 해서 당선이 됐으니까).”
 
  김 회장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대전 대덕구에 출마해 대전고 선배이자 계룡건설 창업주인 민자당 이인구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P 전 의원은 김 회장이 언젠가부터 JP를 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화당 사무처 요원을 했으니 JP를 욕하면 안 되는데… 언젠가부터 JP 욕을 하더라고요.”
 
 
  “정치적 감각 탁월”
 
2000년 14대 총선 당시 선거 포스터.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자신을 ‘독립지사 무정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좀 과격한 스타일이지만 행동을 마구잡이로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정치적인 감각과 능력이 상당히 탁월한 사람이에요. 자신의 행동이 어떤 반향과 정치적 이득을 가져올지까지 꿰뚫어 보는 사람이죠. 과격한 발언도 다 계산된 것이에요. (그때그때) 발언의 수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합니다. 이재에도 밝고, 영리하고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3당 합당 때도 (민자)당을 나가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니 나갔겠죠.”(대전고 출신 D 전 의원)
 
  “짧게나마 같이 근무를 했어요. 그때하고 (지금과) 별로 변한 게 없어요. 주목받기를 좋아하고…. 그때도 이런 튀는 발언 좋아하고…. 정치적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발언을 (해오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여요. 정치인이 변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를 느꼈습니다. 이 선배가 격에 안 맞게 (하고) 다녀서 아쉬웠습니다.”(민정당 공채 출신 C 전 의원)
 
  “어느 고등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관직이나 정계에 진출하면 그 사람이 여든 야든 가리지 않고 도움을 주려고들 하잖아요. 근데 이분은…. 이렇게 평이 좋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대전고 출신 Y 전 의원)
 
  “당료 사회에서는 아무도 그 사람을 선배 공채 당료로 인정하지 않아요. 14대 총선 당시 국민학교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장에서는 방화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요. 처음 김원웅씨가 배지를 달 때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대전고 출신 재선 의원 G)
 
  “김원웅 회장과 민정당 사무처에서 10년 가까이 함께 근무했습니다. 판교에 있는 그의 집에 집들이를 갈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당시 실권을 쥔 이상재-김○○ 라인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달라붙었습니다. 당시 별명도 기억나는데, 차마 그 별명까지는 말 못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치 ‘생계 때문에 민정당에서 일하며 서류나 날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견강부회, 비겁한 겁니다. 민정당에 있을 때 지역구 공천을 받으려 상당히 애를 썼습니다. 내일모레 80인 분이 이제 와 정면에서 왜 나팔수 역할을 하는지….”(민정당 출신 S 전 의원)
 
 
  “수수께끼가 많은 사람”
 
김원웅 광복회장은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백선엽 장군 등을 비난했다. 사진=조선DB
  “수수께끼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철새인데, 명분을 잘 갖다 붙여 (둥지를) 잘 옮겼죠. 정치인이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 뭐라고 할 수는 없는데, 재산 형성 과정은 의문이죠.
 
  김원웅을 잘 아는 사람은 저 사람이 왜 저런 발언을 하는지 그 이면을 봐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저러는 게 아닙니다. 출세를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이라 다른 것은 모두 수단이에요. 광복회장도 수단에 불과해요. 선거철에는 서민들 사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에 전입신고하고, 선거 끝나면 일주일 있다가 서울로 다시 옮겨가요. 위장 전입, 위장 전출인데, 등본 한번 떼봐요. 전 확인했어요.
 
  2010년에는 대전시장에 출마했는데, 이때 정치 인생이 끝났죠. 구의원 3명을 동원해 상대 후보 비방 선전물을 뿌렸는데, 자기만 빠져나오려다가 나중에 구의원들이 자기네만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검찰에 알렸지요. 김원웅 자기 말로는 은퇴했다고 말하는데, 선거법 위반으로 피선거권 박탈 5년을 받았어요. 정계 은퇴가 아니고 정계 퇴출이죠.”(대전고· L 전 의원)
 
  “재산 형성 과정이 가장 의문이에요. 재산이 어마어마해요. 민정당 월급으론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요. 차명(借名)으로 재산 관리한다는 소리가 많았죠. 당시만 해도 투기에 대해 지금처럼 엄격하지는 않았어요.”(민주당 출신 W씨)
 
  김원웅 회장의 재산 공개 내용을 보도한 기사를 소개한다.
 
  〈김 의원은 지난 83년 6월 경기 용인시 보정리 87의 밭 1800여평과 86년 용인시 상현동 385-1, 2 일대 밭 840여평을 매입하면서 주민등록만 옮겨 놓았다. 평당 4500원에 샀던 보정리 땅은 17년 후인 2000년 택지로 개발되면서 평당 50만원이 넘는 금액으로 토지공사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그러나 2000년 재산신고 당시 땅의 취득 경위를 상속 재산으로 허위 신고했다.
 
  또 상현동 밭 중 절반가량은 매입 후 4년이 지난 2000년 5월 6억4000여만원에 매각했고, 나머지(430평)는 대지로 형질이 바뀌면서 현재 평당 400만~5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김 의원은 “보정리에서는 실제 영농을 했으며 투기와는 거리가 멀다”면서 “당시 주민등록지에 방 한 칸을 얻어 몇 달 왔다 갔다 하며 기거해 위장 전입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속재산으로 신고한 건 부모 도움을 받아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2005년 4월1일자 《조선일보》)
 
 
  반론 요청에 대한 반응
 
김원웅 광복회장은 8월 20일 국회 소통관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라고 비판했다. 사진=조선DB
  《월간조선》은 김원웅 회장의 반론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난 9월 9일 오후 4시경 광복회로 반론 질의서를 이메일과 팩스로 보냈다. 9월 11일까지 반론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9월 11일 오후 1시48분 김원웅 광복회장에게 직접 전화해 2분20초가량 통화했다. 김 회장과의 통화 내용 전문(全文)을 공개한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월간조선》의 이경훈이라고 합니다.
 
  “제가 하나 말씀드릴게요. 제가, 제가 국회의원 할 때도, 2001년 이후부터 《월간조선》이나 《조선일보》랑 인터뷰를 한 적이 없어요. 제가, 《월간조선》이, 2001년에 한 번 인터뷰를 했더니, 한 이후에 굉장히 내가 좀 당혹했어요. 제가 한 내용을 비틀어가지고 내는 걸 보고. 그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조선일보》랑은 인터뷰를 안 했습니다. 왜곡하고 비틀고 진실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제가 한 번도 안 해왔으니까. 제가 (반론) 연락을 받았는데, 그 내용을, 제가 질문 내용을 봐도, 진짜 완전히 근거도 없고, 완전히 유언비어성 가지고 질문을 하는 걸 보고, ‘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하는 언론이랑’, 내가 원래 생각했던 생각을 더 강화시켜줬어요. 그러니까 이해를 해주시고. 어쨌든 간에.”
 
  — 회장님 저희는 이걸 주변 분들한테…
 
  “아니, 뭐라고 하든 간에, 주변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요, 전혀 근거도 없고 풍설이고…. 뭐 이런 것들을 이런 거 상식적으로 봐서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스스로 판단을 해야죠, 언론에서. ‘이거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라는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아주 악의적인 내용을, 전혀 그리고 사실 근거 아니고, 전혀, 전혀 그런 내용들을 모아서 질문하는데, 그 답할 가치가 저는 없다는…. 어쨌든.”
 
  — 저희는 답변을 받았으면 하는데.
 
  “아니, 아니, 답변은 의미가 없어요. 그거 갖고 답변하는 거 자체가. 언론의 기본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그런 전혀, 전혀 객관성이 없는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고 답변하는 게 제가 구차스러워서 그렇게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해해주시고. 거의 제가 국회의원 할 때부터 20년 가까이 지켜온 입장이에요. ‘《월간조선》이든 《조선일보》랑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 하는 입장이니까 그렇게 이해해주십시오. 만약에 그건 뭐 알아서, 나중에 거기 기사가 뭐 어떤 걸 가지고, 뒤에 풍문 들어서 하든 뭘 하든 쓰고 나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그 신문사에서 지면 되죠.”⊙
 
지면의 제약으로 김원웅 회장에게 보낸 질의 총 23개 중 일부를 소개한다.
 
  1. ‘1962년 연세대 법대 진학, 1965년 제적, 이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재입학 후 동 대학교 정치학과에 학사편입해 1974년 졸업’한 사실이 맞습니까.
 
  4. 정당보다 더 높은 급여를 주는 기업에 취직할 생각은 없었는지, 이직 시도는 있었습니까.
 
  7. 대만 유학의 목적은 무엇이고, 당시 학위 논문을 작성했다면, 논문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8. 대만 유학 후 복귀해 주변에 ‘장경국과 양자(養子)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발언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12. 꼬마민주당으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JP계가 아니라서 공천을 못 받을 것 같아 탈당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16. ‘2010년 대전시장에 출마해 선거법 위반으로 피선거권 박탈(5년)로 정계에서 퇴출당한 것이지 정계를 은퇴한 것이 아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20. 저서에 백범 김구 선생이 부모님(김근수-전월선)의 중매를 선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주변에 ‘백범이 부모님 결혼식의 주례를 섰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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