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자도(監守自盜). ‘지키는 자가 도둑질한’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 46건 나온다. 감수자도의 범법자는 대부분 지방 수령이다. 재정과 형벌의 권한을 오롯이 가진 수령이 청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일까? 조선시대 형률 법전인 ‘대명률'에서 감수자도는 가장 엄한 처벌의 대상이었다. ‘주관하고 지킬 책임을 가진 자가 스스로 도적질하는 것은 그 죄를 몹시 중하게 여겨서’ 최하 곤장 80대, 최고 목 베어 죽이는 참형(斬刑)으로 다스렸다. 범법자 모두의 오른팔에는 ‘나라의 물건을 훔쳤다’는 문신을 새겼다[刺字·자자].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세종 시대에도 감수자도는 있었다. 황해도 안악군수 최맹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맹온은 1422년부터 2년 동안 백성들에게 나눠줄 파종 씨앗 312석을 빼돌렸다. 그중 200석을 서울의 큰 상인에게 팔았고, 112석은 임의로 썼다. 조정에는 그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고 거짓 보고했다. 그 거짓을 숨기기 위해 2년 동안의 서류를 없애버렸다. 전형적인 감수자도였다. 논란이 된 것은 형량이었다.

형조의 관리는 최맹온이 서울의 상인에게 판 200석만을 도둑질로 간주해서 30관(貫)에 해당하는 죄로 양형(量刑)했다. 장(杖) 100대를 때리고 자자(刺字)해서 유배 보내는 형량이었다.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최맹온이 빼돌린 312석 전부를 ‘대명률'에 따라 도둑질로 계산해야 하며, 무엇보다 최근에 제정된(1425년 2월) 동전법이 아니라 사건 발생 시점에(1423년) 통용되던 저화법(楮貨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어전회의에서 논의케 했다. 세종 재위 7년째인 1425년 5월 19일의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은 모두 형조의 양형을 지지했다. 목숨만은 살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형조 관리가 돌연 태도를 바꿨다. 도둑질한 시점의 물가로 다시 계산해서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만연한 공직 사회의 뇌물 풍조가 문제였다. “고려 말의 뇌물 주는 구습이 아직 남아서 관리들이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히 뇌물로 주고도 태연히 여기는” 상황이 그것이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 등 대다수 조정 관리가 지방 수령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 상황에서 왕이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말하자 형조는 태도를 바꾸어 참형을 청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