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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맞으면서.....

6월 6일 현충일 맞으면서....옛 글을 올려 봅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3분 고인이 되었습니다. 삼가 영면을 기원합니다.

우리 동문 김수현대위 묘역을 6월 4일(화) 방문할 예정입니다.(51묘역 4-43)

동작동 국립현충원 정문 인근 안내사무소 오전 11시 예정입니다. 조화 준비할 예정입니다.

동행 원하시는 분 환영합니다.


민경탁박사, 김현수해병대위, 차수장장군(해병) 이야기 

1. KG55친구 (고)김수현대위와 차수정장군……

작년 2012년 4월 KG55 Difiphono(사진부) 탄생 모임이 동작동 현충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월남전에서 산화한 (고)金壽鉉대위(1967년 1월10일 전사) 묘역을 참배합니다.

안타까움과 숙연함으로 묵념을 했습니다.

최 격전지에 가장 치열한 격전을 펼쳤던 해병이었지만 군의관 戰死는 모두에게 의문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곳은 해병 3대대 9중대 “投網 作戰”을 마치고 철수 중 베트공 기습 공격으로 전사한 

묘역이었습니다.

그날 대한체육회회장 박용성동문에 대한 예우로 우리는 의장대 도열 속에서 헌화 예식도 가졌습니다.

그가 전사한 1967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분주한 기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직업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유학을 떠나 정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66년 서울의대 인턴을 마치고 입대했을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은 타향인 부산에 내려가 합판공장에 필요한 접착제 원료인 Formalin Plant공장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24시간 분주하니 공장 한편에 야전 침대를 놓고 숙식을 했습니다.

국제시장에는 월남전에서 귀국하던 장병들이 아껴 지참한 물건들을 많이 팔던 가난 시대였습니다.

특별히 C-Ration은 저의 가장 중요한 주식 대용이었습니다.

울산 건설중인 한국비료 같은 Chemical Plant에 산업 역군으로 여러 친구들이 참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초반 혼선이 거듭된 월남 전선에 나라 형편상 참전을 결정하는 어려움을 잘 기억합니다.

1964년 비둘기부대 건설지원으로 처음 참전하였습니다. 

전투병 파월을 결정하면서 1965년 9월 청룡(해병여단)이 캄란 그리고 맹호부대가 퀴논에 상륙합니다.

이후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은 17도선 월맹 지배 부근으로 이동하면서 전선을 확장합니다.

여러 전투 중 1967년 2월 해병의 짜빈동전투는 세계 전사에 남는 격전이었습니다.

용맹한 한국 해병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 월맹 정규군 1개 연대의 기습 작전이었습니다.

배트공의 재래식 무기가 아닌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야간 급습한 전투였습니다.

3대대 11중대는 월맹군과 10대1의 열세 속에서 심야 백병전을 치른 것 입니다.

결과 243명 사살되고 퇴각합니다. 이는 해병 전사에 길이 남게 된 전투였습니다.

아군 희생은 15명 전사 부상 33명으로 완승이었습니다. 

전원 1계급 특진 그리고 두 명은 태극무공훈장을 살아서 받게 됩니다.

그 짜빈동전투가 대승한 전투라면 35일전 9중대가 당한 기습은 대패한 전투였습니다.

그 “청룡 9중대 投網作戰”에서 김수현대위가 전사한 것 입니다.

각 중대에는 의무병이 파견돼있고 의무장교는 대대 본부에 위치하나 자진하여 9중대 작전에 참전한 것 입니다.

投網作戰”을 마치고 본부로 퇴각하는 일은 악천후로 미군 Helicopter 동원이 불가능하였습니다. 

2Km 거리 위치한 안디엠부락으로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 부락은 평소 善心工作으로 안심 지역으로 믿고 있었지만 정보가 누수 된 것입니다.

미리 정보를 알고 깊은 계곡에 매복한 베트콩 기습으로 전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장교 4명 포함 33명이 전사하는 대 참패였습니다.

그들 33명이 함께 묻힌 동작동 국립묘지를 우리가 참배한 것 입니다.

지난 9월 박근혜대통령이 Vietnam을 국빈 방문했습니다.

Ho Chi Minh 묘소에도 헌화를 했습니다.

2012년 삼성전자가 Vietnam에서 무려 130억불 수출하면서 첫 무역 흑자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문제로 중국 투자 붐에서 다른 동남아로 이동하고 Vietnam은 그 중심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농촌 총각 배필로 수 많은, Vietnam 여성들이 잘 정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제조업, software, 건설, Service업, 조림 사업 등 다양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회와 협력의 나라가 분명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다양한 치유는 꾸준히 진행될 것을 기원해봅니다.

국부로 호칭되는 Ho Chi Minh 평생 다산 정약용선생을 가장 존경했습니다.

그는 전장에서도 늘 牧民心書를 지녔다라고 합니다.

 

청룡부대3대대 9, 11중대 이야기는 차수정장군(예비역 소장, 해병 차장 전역, 1930년생)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그분은 80대 중반 노령에도 건강하시고 건장한 누가 보아도 해병이십니다.

우영렬/장문영은 그분과 서울대AMP 16기(1983년, 그 당시 곽수일동문 주임 교수) 동기입니다.

아직도 왕성하게 여러 행사와 전국 반공 강연을 다니십니다.

우연히 대화 중 그 당시 3대대 부대대장으로 김수현대위와 가깝게 지낸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난주 만나 뵙고 청취한 내용을 정리한 것 입니다.

결국 김수현대위는 자진 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것 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동기 중 월남전에 참전한 동기가 몇 분 있습니다. 

박용진동문과 이정일동문 해병 장교로 그리고 민경탁박사가 해병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2. 민경탁박사의 첨부 글(1)

 
저에게도 현충일이 되면 생각나는 일이 몇 개 있지요. 

1989 년 인가 東京 가는 길에 하도 말썽이 많은 곳이라 그 야스구니 신사를 가 봤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이 곳이 우리나라의 동작동 국군묘지 같은 곳이라 돌로 된 기념비 부조가 있는데 일본 비행기가 만주 폭격하는 장면 등 

우리가 보면 순전히 狂的인 이웃 나라 침략전쟁 기념관처럼 보입디다. 

일본이 근세에 전쟁한 것이라고는 침략 전쟁 밖에 없고, 죽은 군인들이래야 청일전쟁, 일로전쟁, 필리핀, 인도차이나침공, 

중국침공, 진주만 기습 중. 전사한 사람들 묘지니, 자기들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도 현충일 비슷한 참배예식을 

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알았지요.

하여간 거기에는 저를 슬프게 한 碑가 하나 있습디다. 그것은 전사한 군인들의 유족들이 "전사한 사람들의 가족의 슬픔" 도 생각해보라는 섬직한 유족대표의 메쎄지가 기억에 남니다. 

한국군도 6.25 때, 또 그 후에 월남에서 만도 전사자가 5000 명이 되었다고 들었고 아직도 살아 계실 많은 유족들의 슬픔은 일본군인 유족의 슬픔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지요. 다음 사진 몇 장은 제 사진첩에 있는 것입니다. 

1965년 2월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3 월 초 해군에 입대 鎭海에서 8주 훈련을 마치고 포항 해병사단 군의관으로 발령을 받은 지 3 개월 만에 한국 정부는 월남에 전투부대 파견을 결정합니다.1965년 9월 포항해병대 기지서 첫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결단식이 이렇게 진행됐고, 저도 이상한 흥분에 싸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5일 만에 Viet-Nam 캄란만에 상륙 합니다. 소위 추격사살이 (Search and Destroy) 목표였던 초기 전투 때는, 부상자 사상자가 많이 생겼지요. 해병대의 첫 번 임무는 캄란 만에 공군 기지 방위가 첫 번 과제 었지만 한국 육군 부대가 몇 달 뒤에 파견돼 인계하고 다낭 쪽 북쪽으로 이동하고 자주 전투에 접했지요. 츄라이, 투이호와 라는 생소한 이름의 지역이었지요. 전투가 없을 때는 근처 동네에 대민 진료나 나가, 민간인 치료를 했고.어떤 때는 할 일이 없어 부대 안에 가처 외출도 못하고 부대가 있는 바다가 에서 낙시질...... 또 사병들 포경 수술해주고 선물로 (?) 로 받은 권총 실탄으로 해변가에 가서 가끔 사격 연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같은 여단, 포병 대대에 우리 고교 동기 이윤호가 소대장으로 있어 가끔 만났고 그 친구도 저에게 권총 실탄을 가끔 선물로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法大 들어가서 해군 법무장교가 된 김두희 대위가 한번은 캄란만에있는 우리부대를 방문해 우리 셋이 이렇게 만난 적도 있지요. 벌써 파월 된지 6개월이 지났는데 3 학년 6반 때 옆에 앉아 있었고 대학교 6년간 같이 몰려 다니든 김수현이 한데서 해군, 해병대로 들어가 "부모가 반대하겠지만 월남에 지원하겠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편지를 아직도 이렇게 가지고 있습니다.아래 졸업식 날 찍은 사진 앞줄에 3학년 6반 이였든 안병환, 뒷줄 김수현이 가 보입니다. 이 친구하고는 가정교사 같이 구하러 다니고, 그림 그린다고 몰려다니고 재시험도 같이 자주 쳤고 많은 해를 同苦同樂했지요. 공교롭게 이 졸업사진에 보이는 7 분 중 3 명이 故人이 됐습니다. 뒤 서계신 육군중위는 대학신문에 만화 연재하든 고 김유홍 선배시고, 저는 벌써 임기 일년을 마치고 1966년 9월 다낭을 출발 歸國, 해병대 사령부에서 근무를 하는데 한번은 수현이가 편지와 戰地에서 찍은 다음 사진을 보내왔지요. 

얼마 후에는 뜻밖에 그 친구 편지가 아니라 戰死 소식이 전해 졌지요. 뚜렷한 전선이 없는 그곳에서 부대 이동 중에 적의 습격을 받아 부대대장, 군의관, 사병들이 전사를 한 일이 버러진 것이지요. 수현이는 연로한 어머님의 외 아들 이었고. 파병 6개월 만에 1967년 한국군 군의관으로 첫 번째 전사자가 된 것입니다. 추운 어느 날 동작동 국군 묘지에서 해군 의무장으로 영결식이 이렇게 있었습니다. * 김수현이 부모와 1966년 입대한 同期 (의대 66년 졸업) 3-6 반에 있든 조의렬 중위 (왼쪽 앞에 서있는 분), 부상당해 한국으로 후송돼 치료중인 병원복 차림의 이종무 중위의 사진입니다. 비석은 동기생이 모여 건립한 추모비라고 합니다.

3. 민경탁박사 글(2)
저는 수현이가 월남에 자원해서 온다는 편지 받고 서는, 반대도 찬성도 안했고, 
제 임무 중에 하나가 전사자를 마지막 검진하고 사망진단서 쓰는 작업이었다는 예기 등 한 기억이 있지요. 육군으로 월남에 파견된 3-8 반 권오언 이도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다 어깨에 총상을 받고 후송 귀국했지요. 수현이 한 테 위험은 항상 있다고 썼던 것으로 기억하지요. 한번은 戰死한 병사의 주머니에서 가족에게 미처 써서 부치지 못한 편지도 본 기억이 있지요. 아래 같이 戰死한 군인들은 규정상 bag 에 들어간 화물로 후송이 되지요.매년 이 맘 때 미국의 Memorial Day 가 오면 피어 보지도 못한 꽃송이 같이 body bag 속에 싸여 후송되어 가는 수현이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장례식 날, 눈물을 감추려 든 수현이의 年老 한 어머니 생각이 잊어 지지 않습니다. 

 1 2014-05-13 KG55 55주년 기념행사_0909 (32).JPG2 1967-04 장례식 (2).jpg3 1966-10 (2).jpg4 1966-01-05  (2).jpg5 1966-01-10 (2).jpg7 2014-05-11 KG55 55주년 기념 009 (2).jpg8 2021-06-06 김수현대위.jpg9 김수현대위 묘지 003.jpg10 2021-06-05 현충원 참배_7375 1(5).JPG12 2014-05-11 KG55 55주년 기념행사_0909 (36).JPG13 2019-10-01 최경식 김유후 홍순모 001 (7).JPG14 2019-06-06 현충일 998 (15).jpg15 2019-08-15 임문빈 김강길 장문영 001 (1).JPG16 2023-11-27 Quantico 장진호전투 001 (3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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