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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명품시] 서정주 : 無等을 보며

무등(無等)을 보며---<현대공론>(1954.8.)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6·25 전쟁으로 불안과 공포, 가난으로 삶이 피폐해진 어느 날 시인이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을 보며 삶의 깨달음을 얻어 쓴 시가 시 <무등을 보며>이다.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점심을 굶을 정도로 극도의 물질적 궁핍 속에서 고생을 했던 시기이다. 무등산의 갈매빛 등성이는 긴박한 전쟁도 아랑곳하지 않고 햇빛에 반짝이며 수많은 생명들을 포용한 채 숨쉬고 있다. 그와 같은 산을 바라보며 가난한 남루의 자신은 떳떳하다고 시인은 자부한다. 고매한 인격과 높은 정신적 품격을 가난이 가릴 수 없다는 삶에 대한 긍정적 자세와 긍지를 깨닫는다. ‘청산’, ‘지란(芝蘭)’, ‘청태(靑苔)’ 등의 푸른색의 식물적 이미지와 푸른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무등산의 수직적·상승적 이미지를 통해 고매한 정신적 가치와 삶에 대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자세에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시의 핵심 구절로, 의식주가 부족한 ‘가난’은 물질적인 헌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이 그 속에 감추어진 순수한 마음씨와 본질까지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갈매빛”은 짙은 초록빛으로, 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와 연결된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 여름 산(山)”은 시적 자아가 바라보고 있는 건강하고 짙푸른 무등산을 그린 부분으로,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다.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옥돌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살결과 마음씨로,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타고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지란(芝蘭)”은 지초(芝草)와 난초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둘 다 향초(香草)이다.  “청산이 그 무릎 아래 ~ 기를 수밖에 없다”는 슬하의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르겠다는 다짐이다.  “농울쳐”는 큰 물결이 거칠게 일어나 치는 모습이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은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시련의 상황을 ‘농울쳐’라는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오후의 때”는 괴롭고 고통스런 시기로, 점심도 걸러야 하는 가난을 암시하고 있다.  “내외들이여 ~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에서 가난 속에 부부가 함께 굶주린 상태에 놓인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지어미는 지아비를 ~ 이마라도 짚어라”는 가난 속에 부부가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어려운 상황일수록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가시덤불 쑥구렁”에서 ‘쑥구렁’은 쑥이 자라는 깊고 험한 구렁을 말하며,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극단적인 비참한 삶의 조건을 뜻한다.  “우리는 늘 옥돌같이 ~일인 것이다”에서 ‘청태(靑苔)’는 푸른빛의 이끼를 말한다. 옥돌과 청태처럼 고매한 인격과 높은 정신적 품격의 본질을 잃지 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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