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 언덕엔 회화나무가
— 경기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에 부쳐
화동 언덕
하얀 음악당 옆에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네.
건너편 인왕산도 바라보고
경복궁도 굽어보는
나이가 몇 살인지 아무도 모르는
‘경기(京畿)’와 함께 늙어 온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네.
회화나무는
기미년 3월 1일 그 날
교복 입은 채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
만세 부르다 학교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얼굴들을 알고 있다네.
박 정권 시절
3선 개헌 반대 데모 때
책상으로 교실 문을 막아 놓고
울며불며 나라 일을 걱정하던
앳된 얼굴들도 알고 있다네.
전쟁 때
부산 구덕산 밑 피난살이 천막 교실을,
환도 후
덕수국민학교 한 귀퉁이와 체신부 자리 가교사를 거쳐
5년 만에 다시 화동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을 꿋꿋이 지키던
회화나무야
너를 볼 때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던가.
세월이 흘러
강남 삼성동으로 학교가 이사 간 뒤
이제 너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고향의 늙은 나무처럼
우리들 가슴에 너는 영원히 살아있단다.
바람이 불 적마다
회화나무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진리를 간직하여 ‘자유인’이 되라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문화인’이 되라고
남을 생각하고 함께 어울리는 ‘평화인’이 되라고.
화동 언덕
하얀 음악당 옆
늙은 회화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내 나라 나랏집의 동량(棟梁)이 되세’라는
교가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르네.
2000. 8. 24.


새삼 가슴이 뭉클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