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한글큰사전
이사할 때마다
나를 갈등하게 만드는
무겁고 두꺼운 여섯 권짜리 한글큰사전.
그 엄혹했던 부산 피난 시절
아버지는 첫사랑을 만난 얼굴로
발뻗기조차 어려운 좁은 판잣집에
한 권씩 한 권씩 가져오셨다.
책상으로 쓰는 사과상자 위에
그 사전을 올려놓고
누구도 그 사전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학자도 아니면서
책꽂이에 한글 이론 서적이 수두룩했다.
최현배의 <우리말본>, <한글갈>, 김윤경의 책,
조선어학회에서 나온 <조선어맞춤법통일안>,
그리고 일제 때부터 모아온 <한글>이란 잡지들
일제 말기 캄캄한 시대에
이 잡지들을 독립운동 문서나 되듯이
장롱 맨밑바닥에 감춰왔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전쟁 전 어느 날
용두동 어느 골목길
다 찌그러진 초가집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총각 시절 동네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고려학원>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그 귀한 아버지의 장서들을
어머니는 고물상에게 모두 팔아 버리고
고물상은 <한글> 잡지들을
고려청자라도 얻은 듯이 허겁지겁 집어갔다는 뒷얘기만 들었다.
그 뒤로 낡고 무거운 <한글큰사전>을 멍에처럼 지켜 오며
내 마음바탕에 아버지의 얼굴이
어느새 멍 자국으로 새겨졌음을 깨닫는다.
2019. 10.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