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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동 에피소드 (3) - 놀랍고, 고마운 동창/친우들


우리 고등학교 3학년 3반때 나영준을 모르면 우리반 학생이 아니다. 익살 맞은 농담을 많이 해서 담임선생 이셨던 남규로 선생이 그에게 벌을 많이 주셨던 것이 기억나고, 반장이던 길수하도 기억난다. 길수는 우리 학교 학도 호국단 시가 행진 나갈 연대장으로 앞장 섰고 의젓해서 친형처럼 느꼈는데, 우연한 인연인지, 그가 지난 2월에 씨애틀에서 이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그의 장례 절차에 관여하게 되서조가를 부르고 고인 이력을 전하기도 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들이 보였는데, 영어 해석력이 뛰어나 우수한 영어 성적을 이정민이 생각난다. 그는 영어 문장을 문법에 따라 주어, 동사, 보어, 수식어, 관계 대명사를 도식으로 풀어서 공부 했는데 결국 언어학자가 되었고, 교실 뒤쪽에 앉았던 심명기는 한글이던 한자건 간에 글씨를 아주 이쁘게(neat and clean) 써서 놀랐었다. 그는 졸업 후에 항상 자기가 글귀를 부채를 즐겨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선물하고 있다. 민경탁이 생각나는데 그는 한문으로 일기를 쓴다고 들어서 깜짝 놀랐다. 이조시대 과거급제한 양반 같다고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다닐 방과 활동으로 나는 당수(태권도)반에 들었었는데, 청도관에서 김영만 사범이 우리 학교 당수반을 지도 했다. 키가 작은 나는 키가 크고 날씬해서 다리를 죽죽 뻗으며  옆발 높이차기를 김상수와 박광원이 생각난다. 두친구는 육사를 지원했던 것으로 안다. 그때 당수반에서 같이 수련한 친구중에 먼저 검은 초단을 사람은 이범구와 채오병이었다. 이범구는 무척 알뜰하고 성격이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그의 책상표면은 바니쉬를 발라서 너무 깨끗하고 반짝 반짝 했다. 아무도 그런 발상을 하지 했는데 그는 그렇게 했다. 1971년도에 시카고에서 다시 만났을 그는 건설등 수자원 관리 개발하는 유명한 미국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의 파트너로 했다. 인도네시아와 남미등의 개발 도상국에서 파견 근무 때는 마치 나라 왕자처럼 (집에 하인을 부리며)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때에 시카고에 살아서 자주 만나 회식도 하고 피크닉도 같이 했던 친구들은, 구경회, 임현재, 이호경, 이범구, 유재승, 정종현, 신달수, 임문빈, 이기형, 김선종, 김광집, 그리고 남일우가 있었다. 아마 때쯤 신효현이 시카고 주재 한국 영사관 부영사로 취임해서 우리는 그의 아파트에 초대받고 우리가 마시는 물의 청결성에 대해 테스트 결과를 강의(presentation) 기억난다구경회는 흉곽 내과 전문의로 나중에 주미 한국대사(류병현 대사) DC에서 구경회 의사의 진단을 받으러 시카고까지 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내도 내가 1971 1월에 아리조나 에서 추운 겨울에 위스컨신(Racine) 직장을 얻어 왔는데, 그때 아내가 너무 심한 폐염에 걸렸을 , 호텔까지 와서 진단을 하고 처방을 줘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친구들 중에 종현과 달수는 교회 학생관에서 만나서 탁구도 치고 담소와 식사를 많이 나눴다. 이중 김선종은 같은 동네 혜화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대학교 시험보러 내가 같은 동네 친구들(김선종, 양유석, 이상은) 같은 택시를 타고 가게 되었다. 학교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릴 , 이상은이 연필을 자기 주머니에서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만 연필 촉이 부러졌다상은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하얗게 변했는데, 상은이는  다행이 합격이 되어 이런 것은 불길한 예감이 될수 없다는 것이 증명 되었다내가 아는 김선종이는 정말 순직하고 꾸밈이 없는 진실한 친구다. 이친구는 내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1977 다시 미국으로 돌아 공항에 나를 마중나왔는데, 여행가방을 끌고 자기 차가 있는 건너편오로 가다가 옆으로 달리던 차에 치었다. 깜짝 놀라 다가가서 다친데 없는가 봤더니 다행이 가방쪽으로 부딛쳐서 부상은 없었다. 얼마나 놀랍고 미안했는지 지금도 아찔하다. 시카고에서 사업을 일구고자 애쓰는 내게 마음을 주던 착한 유재승과 선종이와 함께 자주 가끔 커피 숍에서 만나서 정다운 담소를 나눴다. 내가 가장 믿음직스럽고 의협심이 강하다고 느꼈던 그리고 사연도 많은 친구는 구제성이다. 제성이는 학교 다닐 이선구와 친해서, 나와도 자연히 친하게 되었는데, 가족회사를 제법 크게 운영하시던 그의 부친이 그가 대학 입학시험 즈음에 갑자기 돌아 가셨고, 그래서 1 재수 후에 나와 서울 상대에 같이 다니고 후에 ROTC 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글래스를 쓰고 수송장교로서 많은 보급 수송차량들을 선두에서 지휘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소위 계급장이 하나 늠늠한 장군 (준장)모습오로 보였단다.  제성이는 거의 매일 만나서 같이 지내는 친구중의 친구가 되었다.  하루는 명동거리를 같이 가다가 서로 내기를 했는데 누구든지 지나가는 모르는 여대생을 먼저 꼬셔서 다방에 데리고 와서 차를 마시게 되면, 값을 지는 편이 내기로 했다. 내가 무슨 만용이 했는지 마침 지나가는 여학생을 좇아가서 말을 붙였는데, 서울대학 교복에 끌렀는지, 여자의 호기심이 작용했는지, 내가 서로 만나서 클럽을 만들자고 우기는 것을 이기는 척하고 따라와 줬다. 결국 S 여대 미술과 학생들과 클럽을 결성하고, 서로 음악당에서 만나고,그들 학교 미술 전시회에도 참석해 주는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중의 쌍이 결혼하게 되었다. 제성이는 결국 부친의 가업을 형과 함께 이어 받았는데 서울 근교에 공장( 건물 지붕에 설치하는 water tank 제조 설치업) 있었다. 그의 형은 경기 53 선배 연대 경영과 전공이 사장이고제성이는 전무이사로서 모든실무와 책임도 맡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사업이 부진하여 발행된 수표가 부도가 되었다. 당시 회사 수표나 어음이 부도가 나면 경찰에서 구속하는 제도였는데, 형식적으로나 실제로나 사업을 이끌고 지시하는 사장이 책임을 지고 구속되어야 하지만, 제성이가 자원하여 책임을 지고 스스로 구속이 되었다. 때마침 나와 다른 친구들이 의논하여 당시 서울 시경국장인지, 치안 국장이던 이건개를 면담하고 선처를 구했다. 다행이 이건개 마디 명령에 따라 금방 풀러 나올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는 4 형제 중의 둘째인데 막내(경기 60) 동생만 의사로서 가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머지 3 형제가 사장을 차례로 하면서 기업을 키웠다. 우리 친구들이 만나면 항상 물주는 제성이 었고, 집이 인천이기 때문에 저녁에 친구들과의 만남이 통행금지 가까운 시간에 끝나면 웃돈을 주고 소위 총알 택시를 종종 이용 했다. 댁에는 오래전에 과부가 되신 할머님과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성이 지극했다. 사업상 술을 끊을 없었지만 인천 제일 순복음 교회의 주축 권사님인 어머니의 신앙 따라 교회 예배는 참석을 하였고, 장로 직분까지 받았지만 절대 장로 직분을 세운적이 없어서, 친구들도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교회에서 필요한 구제사역과 선교 사역에 많은 재정 지원을 했다. 그는 어머님이 그렇게 결혼 하라고 독려 했음에도 물구하고 한사코 사양 했는데, 이유는 형이 독신으로 남아 있으니 자기도 따르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많은 성인병과 싸우고 있어서 가정 이루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내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면 그는 흔쾌히 자기가 소유하고 살고 있던 부평 소재 아파트를 일주일 동안 비워주고 냉장고에 맛있는 반찬을 채워 놓고, 제주도 비행기 표까지 사주는 잊지 못 할 관대한 친구다. 그가 별세하고 나서 알게 사실은 우리 친구들 중에 재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자기 유산을 떼어서 주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친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 세상에서 아주 귀중한 선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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