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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맞은 첫 7워 14일 / 조두영

2001.9.8.
                            내가 맞은 첫 '7월 14일'  

                                   趙  斗  英

   
  오늘도 프랑스대사관에서는 저녁에 성대한 축하연이 열리고, 프랑스 중세기사(中世騎士) 작위를 받은 우리동문 조성장(趙成章)이는 부인을 대동하고 출두해 좌중을 그
유창한 프랑스어 농담으로 휘어잡을 것이다. 내 숨은 꿈 하나가 이 자리에 초청받는 것인데, 평생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허긴 내 편에서도 그리 되도록 노력한 바도
없긴 하다. 이력서에 프랑스와 관계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않은가. 그래도 하늘이 있다면 언젠가는 내 숨은 공로를 알아주겠거니 하는 엉뚱한 망상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내 공로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최초의 ‘까또르즈 쥬이에(7월 14일, 프랑스혁명기념일)’ 축제를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집행한 서너 명 가운데 내가
끼었었다는 사실이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없었던 행사였다. 막 대학에 들어 온 1955년의 일이다.

 필름이 낡아 화면에 비가 죽죽 내리던 영화 ‘무도회의 수첩’을 단성사에서 보고, 생송생송한 기분으로 인사동 르네쌍스에 들르니 낯익은 얼굴 여럿이 우연히 거의 같은 시간에 하나씩 들어왔다. 모두가 각기 그 영화를 보고 들어 온 것이다.
들뜬 상태라서 쉽게 이야기가 되어 문리대 식당을 빌어 그 해 프랑스혁명기념일 축제를 열기로 정했다.
왕초에는 정치학과 4년생인 이기양(李基陽), 중간 마네져로는 불문과 2년생 한철수(韓喆壽), 똘마니로는 다 같은 햇병아리인 영문과의 임재경(任在慶), 정치학과의
현희강(玄熙剛)과 의예과의 나 였다.

   

  그 날은 오늘처럼 잔뜩 날씨가 찦으렸다. 1학기 시험이 막 끝난 터라 사람들이 꽤 모였다. 나는 미리 가서 오색 테이프도 걸고, 돈까스 안주와 과자부스러기를 채근하는
등 폼을 잡았다. 왕초형님이 나무통 다섯 개에 약주를 양조장에서 막바로 실어 와 표주박을 띄워서 식당 한가운데에 놓고 아무나 퍼먹게 하였다.  찌그러진 유성기에서는 쉬지않고 샹송이 나왔다.  에디스 삐아프(Piaff)와 쥴리엣뜨 그레꼬(Grecco) 것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때 입력된 “Je ne regrete rien …” 과 “아, 빠리, dans chacque faubourg …”을 잘 흥얼거린다.  불문과 4년생 이일(李逸)이 나와 프랑스 시(詩) 두어 수(首)를 읊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무도회의 수첩’에서 도둑 루이
쥬베가 잡혀가며 읊어대는 쟉끄 쁘레벨의 시 였다.  막판에는 참석자가 다 같이 ‘라 마르세이유’를 불렀고, 한번으로 양이 차지않아 끝없이 부르고 또 불렀다. 딩구는 빈
나무 술통을 두드리고 발로 차며 우리는 둥그렇게 돌기도 하고, 쏠로로 덤벙덤벙 뛰기도 했다.

   

  뒷풀이로 간 대학로 쌍과부집에서 왕초는 내게 “너, 본과에 가면 명주완(明柱完)이란 정신과교수를 알게 될 터인데 말이야…”라면서, 자기가 제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왕초는 6.25때 일선 소대장 소위였다. 고지에서 부하가 무더기로 죽어가고, 특히 소대장들이 적군의 표적이 되어 제일 잘 죽었다. 그래도 멋모르고 열심히 싸웠는데, 모처럼 휴가가 나왔다. 처음 보는 후방은 뜻밖에도 나사가 풀려 있어 그간의 자기 희생이 어리석게 보였다 한다. 그래서 귀대하자마자 정신이 나가버렸다. 미친 사람이 되어 그는 부산 6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왔고, 그때 담당 정신과과장이 대학에서 징집되어간 明소령 이었다.  이제는 병이 나았지만, 그제부터는 다시 귀대하기가 무서워졌다.
매일 진찰하는 明소령은 그를 퇴원시키려는 듯 해서 그는 일부러 하루는 자기가 싼 똥을 明소령이 보는 앞에서 먹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의병제대를 하여 대학에 이렇게 복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때 明선생님이 나를 정말 환자로 여겨 제대시켰는지, 아니면 불상해서 그랬는지를 나중에 네가 물어 알려줘!”라는 부탁을 왕초는 취중에 내게 했었다.

   

  이 한국 최초의 ‘까또르즈 쥬이에’ 축제 왕초인 李基陽은 그 뒤 조선일보 명기자로 좌충우돌하다가 베를린 특파원이 되어 가서 얼마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북에 갔다
느니, 납치되었다느니, 도중에 반항하다 죽었다느니 한동안 말이 많았다.  평양 대남방송에 한번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반가워 하기는 하였었다. 나는 이 왕초의 부탁을 대학시절 이행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하려고 해도 明선생님이 이미 타계하시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제는 내 실력만으로도 그에게 “사람은 아무리 미쳐도 자기 똥은 먹지않아요”라고 답할 수 있게는 되었다.

 눈 똥그란 선배 李基陽, 해마다 이 날이 오면 떠오르는 얼굴이다. 
 어디에 있던지 살아만 있어주었으면 !

그래서 언젠가 우리도 프랑스대사관에 불려가 말단급 騎士마부 훈장이나마 함께 받았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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